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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바이효니 2017. 8. 15. 12:53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광복절인 15일(화) 오전 11시, KBS 1TV에서는 특집 <유일한, 독립을 말하다>가 방송되면서,

유일한 박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과거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쓴,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 유일한. 지금 바로 보시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CIA의 전신인 미육군전략처(OSS)는 한반도에 침투해 일본을 무력화시키겠다는 목표로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를 계획했었죠.

그런데 이 작전의 정예요원들은 다름 아닌 한국인. 그 중 암호명 A는 한국인이였습니다.

그는 나이 쉰에 가족을 남겨두고 특수 공작원이 되기로 한 사람, 다름아닌 유일한 박사였죠.



“암호명 A는 한국인이며 나이는 50,

그의 부인과 두 자녀는 콜로라도주에 살고 있다”라는 것이 A에 대한 설명이였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와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사(General Electric) 등에 취직하였다가, 

1922년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를 운영하여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이 마련되자 선생은 곧 귀국을 서둘렀고 그는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1926년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요.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죠.



 

 

아울러 선생은 1928년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라는 영문책자를 간행하여 미국인들에게 우리 나라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한양행의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진력하고, 우리 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하였죠.



그가 과거 CIA 조직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데에는, 

CIA 문서가 비밀 해제되면서입니다.

 암호명 A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유한양행의 창업주로 알려진 고(故) 유일한 박사였는데요.


 

 



유일한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 유일링이 최초로 공개하는 할아버지의 감춰진 이야기에 따르면, 작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후, 유일한은 어린 아들딸을 믿을만한 가정에 맡겼다고 합니다.


 

 


평양 출신인 그는 아버지 유기연, 어머니 김확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는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로도 알려져 있죠,

1926년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했습니다.


 

 


독일의 도마크에 의해 개발된 ‘프론토실(Prontosil)’을 동양에서 제일 먼저 도입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유일한 박사를 대기업 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기도 했습니다.



 

 


사망 전 그는 “주식은 전부 학교에 기증하고, 아들은 대학까지 공부를 시켜줬으니 이제부터 자신의 길은 스스로 개척하라”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죠.



 

 

이종대 유한킴벌리 초대회장은 유일한 박사의 자녀를 대신해 회사를 이끈 인물로 이 회장은 “딸이고 아들이고 회사에 개입이 없었다”면서 “그분 곁에서 보니까 기본 정신이 가족을 위한 게 아니라 머릿속에 민족이라고 하는 게 철저하게 박혀있더라”고도 말했습니다. 



 

 

유 박사는 1969년 외아들이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1895년 출생으로 1971년에 사망했다.독립운동가 유일한 박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죠.



유일한 박사는 미시간주립대학교 등을 졸업한 뒤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는데요.

유한양행은 유 박사의 이름을 딴 유한과 세계로 통한다는 뜻의 양행을 합친 말로, 유한양행의 상징인 '버들표'는 유 박사의 성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유한양행은 세워진 첫 해 염색약, 위생용품,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플라민) 등을 미국에서 수입해 팔았고 이듬해부터 화장품, 농기구, 염료 등도 팔았죠.

 1936년 유한양행은 주식회사로 전환했고 초대 사장에 유일한 박사가 취임했습니다.


 

 


1941년에는 수출을 전담하는 유한무역회사를 세웠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조업이 중단된 이후 1953년 본사 사옥을 다시 짓고 사업을 재개했습니다.

 1957년 미국 제약회사인 사이나미드와 기술 제휴 협약을 맺었으며 이 해에 유한양행은 국내 최초의 항생물질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1971년 창업자 유일한 박사가 타계했다. 유 박사는 손녀(당시 7세)에게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딸에게 묘소 주변의 땅 5000평을 물려주는 것을 제외하고 전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부해 화제가 됐죠.

이 재단은 1977년 유한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과거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유일한 박사를 대기업 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기도 했습니다.

유 박사는 1969년 외아들이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1895년 출생으로 1971년에 사망했죠.



1905년, 유일한은 열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를 서서히 장악해가기 시작했을 당시 

그의 아버지 유기연은 나라를 구할 인재가 되어 돌아오라는 당부와 함께 어린 아들을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그를 미국으로 데려간 이는 훗날 임시정부의 외무장관을 지냈던 박용만의 삼촌 그 인연으로 소년, 유일한은 독립운동가 박용만에게서 ‘내 손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열네 살 때,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고, 스물넷에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에서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결의문을 작성했죠.



이 시대에, 유일한박사와 같은 기업인들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재산을 민족의 번영을 위해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죠.

그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그의 업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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