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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완용 가계도 이병철

바이효니 2017. 8. 14. 21:13

이완용 가계도 이병철


 

 


나라를 팔아버린 매국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름아닌 이완용이죠.

광복절을 맞이해 매국노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현재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과 이완용 가계도에 대해 지금 바로 보시죠.


 

 


그나마 남은 땅들도 이완용의 후손들이 광복 이후 거의 팔아버리면서 재산 환수는 사실상 흐지부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매체의 취재 결과 이완용 후손들이 계속 대물림해온 땅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나라를 판 자의 후손과, 나라를 지킨 자의 후손.

백년 가량의 시간이 지난 지금, 두 모습은 확연히 다릅니다.



 

 

시대의 재산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친일파 후손과, 기초 생활수급자의 삶을 살고 있기도 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

어찌 다른 모습의 현재를 만나게 된 것일까요?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한 야산입니다. 이곳에 있는 496㎡ 규모의 땅의 소유자를 확인하자, 이 모 씨란 이름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지난 80년대 말 캐나다에 이민 간 이완용의 증손자라고 합니다.


 

 


마을주민은 땅의 주인인 이완용에 대해, 

아 이완용 씨, 이쪽인 것 같아요. 그분에 관계된 산이라고 하더라고요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역대 내각 총리 대신은 위와 같은데요.

1대 이완용, 2대 박제순, 3대 다시 이완용이라고 합니다.

이후에는 폐지되었다고 하네요.



위의 사진은 이완용의 친필인데요.

당시 그는 국가내외적으로 외교적인 업무를 많이 맡아서 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위의 사진은 과거 이완용의 저택의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은 현재, 종로구 익선동에 위치한 이완용의 환수되지 않은 저택이죠.



 

 

이완용 가계도입니다.



증손자 이 씨는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길의 아들이다. 이병길 역시 중추원 참의를 하는 등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반민족행위자이죠.

그들의 남은 부동산은 당초 친일파 이병길이 소유했다가 아들 이 씨(이완용의 증손자)에게 넘겨졌다고 합니다.



부동산의 일부는 제 3자에게 매매됐고, 일부는 여전히 이 씨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제 3자에 팔지 못하고 남은 땅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증손자 이 씨는 1990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 시가 30억원 상당의 서울 서대문구 일대 토지를 돌려받아 되팔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이완용 증손자가 보유한 용인시 땅은 크기가 작지만, 정부가 나서 소송을 제기해 친일 대가성을 입증하면 환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마부작침>은 증손자 이 씨의 주소지로 적힌 서울시 강북구 주택을 찾아갔지만, 이 씨는 살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친일조사위 관계자는 “증손자 이 씨는 과거 소송을 통해 돌려받은 땅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땅을 처분해 현금화 한 뒤 1980년대 말 캐나다로 이민을 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문제의 땅은 팔지 못하고 남은 것으로 보이는데, 친일파 이병주가 소유했다가 넘긴 것이라면 친일 재산일 가능성이 높다"며 "작은 땅이라고 하더라도 정부가 나서 친일 재산이 확인되면 적극 환수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SBS가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의 전체 재산 규모를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전해집니다.

노무현 정부 때 출범해 4년 동안 활동했던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내부 보고서를 단독 입수해, 이완용이 소유했던 전국의 땅이 실제로 어느 정도였고 또 아직 환수되지 않은 재산은 얼마나 되는지 추적했다는데요.


 

 


 

 


왼쪽부터 이완용, 조카이자 식민사학자였던 이병도, 현 서울대 총장 이장무, 현 문화재청자 이건무입니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아직까지도 국가 주요 보직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군요.




 

 

땅의 소유권 이력을 추적해봤습니다. 직전 소유자는 현 소유자 이 씨의 아버지이자 이완용의 장손자인 친일파 이병길입니다.

친일재산조사위 전직 조사관은 SBS와 통화에서 "땅 소유권 흐름으로 볼 때, 문제의 땅은 이완용 일가가 소유했던 친일 재산일 가능성이 크다"며 "환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죽기전 자신의 아들에게 남긴 유언으로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라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더욱 화제가 되었죠.

이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국민들은 격분을 금치 못했습니다.

.


하지만 실제로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환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

반면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특혜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의 땅을 취재하던 취재진은 전북 익산과 서울 종로 등에서도 이완용 후손들이 광복 이후까지 보유했던 땅 16만㎡를 확인했지만, 이 땅들은 이미 제3자에게 넘어갔다고 하는데요.



107년 전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사건이 일어났었는데요.

이날 이완용 당시 총리대신은 명동성당을 방문해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오전 11시 무렵 그는 성당 문을 나섰고 그가 인력거에 타자마자 한 남성이 이완용을 향해 달려들어 세 차례 칼로 찔렀습니다.

남성은 이완용이 쓰러지자 만세를 부른 뒤 담배를 피웠죠.

이 남성은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이재입니다.



그는 만세를 부른 직후 현장에서 체포됐고 이듬해 사형을 선고받은 뒤 순국했다고합니다.

당시 이재명은 이완용이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이완용은 중상을 입은 채 숨이 붙어 있었죠.

이완용은 중태를 입었으나 수술 후 이듬해 2월 14일에 병원에서 퇴원했습니다.

이재명은 친일 매국노들을 암살하는 것이 국권 수호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매각 시점이 최근일수록 환수 가능성이 큰데, 조사위는 1%도 환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장완익 전 친일재산조사위 사무처장, 현 변호사는 법(친일재산환수법)이 시행(2006년)되고 난 이후까지 계속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대해서만 국가 귀속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국가 귀속 결정을 했던 재산은 상당히 적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나의 생명은 빼앗더라도 나의 충성된 혼은 뺏지 못한다.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생전의 한을 기어이 설욕하리라."

그런데 마침 12월 22일이 이재명 성남시장의 생일이라고 해 주목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조사위가 4년간의 시한부 활동에 그친 탓도 크다고 합니다.

사실상 중단된 친일재산 환수, 어디선가 친일재산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흔히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친일파, 매국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제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 1907년 2월 2일, 충복이요 비서였던 생질 김명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은 처음 스물다섯 무렵에 종래 조선 사람들이 목적으로 삼던 문과에 합격했었다고,

당시 미국과의 교류가 점점 요긴했기 때문에, 그런 때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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